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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자동차 이야기

프랑스 자동차 덕후, 디용 부통

by 핑크맨 2021. 9. 4.

 

알베르트 드  디용(Albert  de Dion) 



-자동차를 유난히 좋아하던 남자

 

프랑스에 모험을 좋아하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알베르트 드 디용(Albert de Dion) 후작으로 파리 시내에서 몇 대의 증기 자동차가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곤 자동차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우연한 기회에 전시된 모형 증기 기관을 구경하게 됐습니다. 그는 모형을 보고 그 정밀도가 뛰어나다고 생각했고 제작 회사를 찾게 됩니다. 그곳에서 기술자 조르쥬 부통을 만나게 되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함께 제작소를 차리게 됩니다. 작게 축소된 모형 기관을 만든 경험을 살려서 실물 제작을 하기고 결정했고 1883년 첫 4륜 증기 자동차 디용 부통호를 만들게 됩니다. 과거의 모델은 보일러를 설치한 전륜 구동형이어서 조향 장치를 자연스럽게 후륜이 맡았습니다. 하지만 이 제작소는 아직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본격적인 생산을 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을 벌고 있는 동안 증기 보일러를 생산해 서자 금을 먼저 조달하고 그런 뒤 1889년 4륜 증기차를 만들었습니다. 

 

 

 

 

-빅토리아의 탄생

 

그렇게 1894년이 되자 증기 자동차 빅토리아를 세상에 꺼내놓았습니다. 여기서 만든 이용 부통 자동차는 그 당시 경주로 분야에서 크게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 그 일이 있기 훨씬 전부터 자동차 제작자들은 그 실용적인 가치를 알리고 싶어 했습니다. 따라서 자동차 경주에 자주 출전했는데 내구력에서 극단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해에 파리와 르왕 사이에 이루어진 경주에 참가했고 가솔린 자동차는 놀라운 속도로 앞지르게 되고 먼저 도착했습니다. 이로써 가솔린 엔진의 우수성을 검증되었고 주최 측에서는 증기 자동차의 화부 탑승이 규칙 위반이라며 문제를 삼아서 그들의 우승을 빼앗아버립니다. 

이 사건은 주최측의 의도적으로 벌인 일이라고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해서 비용과 부통은 가솔린 기관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 무렵 말 그대로 자동차광으로 변신한 디용은 1894년 프랑스에서 자동차 클럽 최초로 만들게 됩니다. 

 

 

 

-프랑스 자동차의 흥행

 

그 당시 유럽 전체의 자동차의 수는 500여대 조금 넘는 수준이었는데 그중에서 프랑스가 절반도 넘는 300대 정도를 보유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파리 번화가에서는 자동차를 흔하게 볼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초창기에는 자동차가 금방 고장 나는 일이 많았고 그 당시 프랑스의 귀족들은 자동차를 타는 것보다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을 더 선호했고 그 결과 도시 교통은 말이 지배하게 된 것이 이유였습니다. 결국 자동차는 흙먼지가 많이 일어나는 시골길을 주로 다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귀족과 부유한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이 자동차 좋아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운전을 하는 사람이야말고 시대를 앞서가는 스타일을 아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하도록 말입니다. 그때 유럽 각 지역에서는 가솔린 기관의 인기가 계속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비교적 무게가 더 나가고 효율까지 낮은 증기 기관의 인기는 줄어들고, 동력 구조가 우수한 가솔린 엔진을 제작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1895년 소형 단기통 엔진을 개발되었습니다. 이 엔진은 개발에 대한 특허를 취득하고 3륜차에 설치하게 됩니다. 최고 속력은 48Km에 달하는 기계식 브레이크까지 장착된 이 자동차는 큰 인기를 끌게 되었고 1899년까지 생산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898년 3.5마력으로 올라간 출력을 갖춘 4륜 차 (단기통)가 출시되자 그 차에 대한 수요도 늘기 시작하면서 공장 자체를 에르네스트라는 도시로 옮기고 본격적인 양산 체제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러나 증기 기관 생산 또한 함께 진행해서 합승 버스에 부착할 수 있었습니다. 비용 부통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1900년까지 3륜 차와 500개 달하는 엔진을 만들어서 프랑스는 물론이고 영국, 미국, 독일, 등 여러 나라에 수출할 정도로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됩니다. 초창기에는 상당한 부분에서 시작 차의 엔진이 거의 디용 부통의 꿈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거기에다가 1902년 후륜 구동의 디용 차축을 개발해서 발표까지 하고 나니 대다수의 메이커들이 이 방법을 받아들이게 되고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도전 그리고 실패

 

 

그렇게 1908년 2월 12일 르 마땡 신문에서 주최한 세계 일주 경기에서는 프랑스 대표로 참가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뉴욕에서 파리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경주는 그 전 년도 북경 경주 대회(북경 ~ 파리)에서 패배했던 것에 대한 복수전의 의미로 열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경주에서도 3대의 비용 부통 모두 경기 도중 포기하고 맙니다. 결국 우승은 미국 자동차 토마스 프라이어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런 뒤 모든 경주에서 빠지게 된 프랑스 자동차 협회는 그때부턴 대량 생산에만 주력하게 됩니다. 1897년 창립 시절에는 직원도 200명이었는데 1900년이 되자 900명에 이르게 되고 10년이 지난 지금은 2000명이 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연간 생산량은 3000 대를 넘어섰습니다. 한창 자동차 붐이 일어나던 좋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번창할 것 같은 자동차산업도 1차 세계 대전 1929년 세계 대 공황을 겪으면서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소형차 모델Q를 시장에 발표하기도 했지만 1932년에는 거의 모든 기반이 약해진 중소업체처럼 경제 위기를 극복에 실패해 자동차 생산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엔진 생산만 근근히 이어오다가 1930년 대 말에는 결국 폐업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