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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자동차 이야기

오펠 자동차의 출발, 성장 이야기

by 핑크맨 2021. 8. 28.

 

-오펠 회사의 시작

 

초기 자동차를 제작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견직물 제조, 자전거 수리, 보일러, 마차 제작, 철공소 등 오늘 소개할 오펠의 창업자 아담 오펠(Adam Opel)도 그 당시 고급 기술에 들어가는 외양간에서 시작한 자물쇠 제작을 시작으로 1862년에는 재봉틀 제작을 시작하고, 다시 1887년 자전거 제작소를 차리게 됩니다. 


하지만 1895년 아담 오펠이 죽게 되고 그의 아들인 칼과 빌헬름이 뒤를 물려받습니다. 그들은 회사와 제품의 광고 효과를 높이고 판매를 늘리기 위해 직접 자전거 경주에 출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정부가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면서 1898년 루샐스 하임이라는 지역에 오펠 자동차 회사를 창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과정에서 교통 수단 생산 회사로 변모하게 된 오펠 사는 정확히 1년 뒤 단기통의 4마력 배기량 1.5L 2단 변속 벨트 구동식 차를 세상에 선보입니다. 

 



-기술력 발전을 위한 과정


그러나 첫 차에서 문제들이 많아 곧 바로 2호차를 만들게 됐습니다. 고무 타이어를 사용해 최고 시속 40Km까지 달릴 수 있는 차를 개발했고, 이 차가 몇몇 자동차 경주에 출전했지만 기술력으로 크게 앞섰던 프랑스 자동차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1902년 프랑스의 다라크 사 와 기술 제휴와 공동 판매 계약을 통해 기술력을 쌓게 됩니다. 그런 뒤 1905년 자력으로 만든 17000 마르크의 고급 자동차를 탄생시키고, 기술 협력 관계는 그다음 해까지만 이어갑니다. 


이 당시 가성비가 높은 소형차 생산을 시도했습니다. 일명 닥터(Doctor)의 자동차라는 별명을 가진 이 차가 접이식 지붕에다가 2기통 2인승이었는 데, 제작비는 4000 마르크 밖에 들지 않았고 32000 마르크의 6기통의 메르세데스 보다 아주 저렴했습니다. 


그 당시 광고 전단지에는 “기동성과 사치성에 대해서 리무진과 같은 급이면서 특히 바퀴를 쉽게 교체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 수리 할 수 있다"라고 실렸었습니다. 또 유니폼의 멋진 운전사를 데리고 다니는 고급차와는 다르게 중산층 시장을 노려서 제작했기 때문에 구매자 입장에서 직접 운전하는 즐거움도 제공했습니다. 


그렇게 오펠 차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점차 자동차 경주에도 출전하기 시작합니다. 1907년 독일 황제 카이즈 빌헬름 2세가 주최한 경주에서 비록 우승은 프랑스 차가 했지만 독일 차로는 유일하게 3위를 차지해 황제에게 격려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재 도전 끝에 강력한 경쟁자였던 브리첸 벤즈가 스피드 부문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고, 오펠 회사에서도 16개의 흡배기 밸브를 장착한 특수 제작 차를 만들어 도전해봤지만 결국 기록을 깨지는 못했습니다. 어쨌든 오벨 사는 1차 세계 대전이 시작하기 전까지 순탄하게 성장했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이 가져다준 타격과 극복

 

하지만 1차 세계 대전에서 지면서 독일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었고 그 영향은 오펠사에게도 큰 피해로 다가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량 생산된 제품들이 여러 나라에서 밀려들기 시작하자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던 독일은 속수무책으로 손을 쓸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1920년 대에 들어와서는 미국의 대량 생산 작업 모델을 도입하기 시작했고 그때 프랑스의 시트로엥사가 오펠사에게 대량 주문 생산을 의뢰했습니다. 그와 함께 경기는 점점 회복되기 시작했고 오펠 사는 1924년 4기 통 12마력 자석 점화식 엔진을 장착한 소형차를 발표하게 됩니다. 


초록색 한 가지로 색상으로 제작되 이 차는 개구리라는 별명을 갖게 됩니다. 이 차는 하루 평균 25대씩 생산되었고 3년 뒤에는 평균 100대로 생산량이 증가했습니다. 이 차는 2인승이 가능했고 가격은 4500 마르크, 속도는 최고 시속 70Km였습니다. 하지만 이 차는 판매를 시작함과 동시에 트레 플레라는 시트로엥사의 제품 복제한 게 아니냐는 논란으로 한동한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다른 점은 시트로엥의 핸들이 왼쪽에 있었고, 오펠 사는 오른쪽에 있었던 점뿐이었습니다. 이 일은 곧 원만하게 해결되었고 개구리는 다시 판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1928년 오펠사의 총생산량은 독일 전체의 약 37%를 차지하는 성과를 이루었고, 이 당시 벤츠나 다이믈러사에서 스피드를 중심으로 제품 판매를 하기 시작하자 오펠사도 1928~29년에 가장 빠른 차를 제작할 목적으로 과학자 막스 발리에의 도움을 받아 4대의 실험차 Rakate를 만들었습니다. 

 


-스피드 자동차 경쟁의 시작


1호 자동차는 기존 자동차 뒤에 12개의 고체 로케트를 장착해 시속 100Km를 달릴 수 있었고, 2호는 유선형으로 24개의 로켓을 부착해서 210Km/H를 기록했습니다. 3, 4호차는 30개의 로켓을 달았고 철제 바퀴를 끼워 철길 위에서 테스트한 결과 281Km/H를 달성했습니다. 이 자동차가 최초의 로켓 엔진을 장착한 것이었지만 스피드 경주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해서 연구 도중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중소 기업들은 미국의 물량 공세에 밀리기 시작했고, 해마다 그 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오펠사의 경영진 입장에서는 개구리 자동차 판매의 상승세를 이어가고 싶었습니다. 1929년 GM사와 합병을 신청했고 GM 입장에서는 유럽지역에 자회사가 필요했던 차에 오펠사처럼 건실한 회사와 협력하게 되어 마침내 합병을 선언합니다. GM 계열사가 된 오펠 사는 새로운 중역진의 계획에 따라서 빠른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1930년대 초 2만 대였던 생산량이 그 해 말이 되자 14만 대까지 늘어났습니다. 그 시절 히틀러는 미국 GM 산하에 들어간 오펠사가 눈에 거슬렸고 어떻게 해서든 성장을 저지하려고 계획적으로 폭스바겐 사와 오펠사에 독자적인 국민차 개발을 지시했는데 1935년 각각 시작품이 완성되었지만 오펠사의 카 다트는 제외시키고 폭스바겐의 비틀(Beatle)만 채택하게 됩니다. 


이 결정으로 오사는 타격을 받게 되지만 카 다트는 수출을 통해서 좋은 평가를 꾸준히 받게 됩니다. 그 뒤엔 내수 시장에도 환영을 받게 되고 그 시기에 출시된 대중 모델인 캔틴, 아드미랄, 올림피아를 시장에 내놓게 됩니다. 2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 나온 모델 중에는 P4가 있었습니다. 이 차는 4기 통 1074cc 23마력, 중량 755Kg, 최고 시속 85Km, 가격은 1450 마이크였습니다. 그러나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됩니다. 오펠 사는 자연스럽게 나치의 수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무기 생산에만 전념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다시 재정비하여 GM의 계열사로 활동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