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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자동차 이야기

독일 자동차의 아버지, 다이믈러와 벤츠

by 핑크맨 2021. 8. 26.

자동차 발전 핵심, 다이믈러와 벤츠

 


자동차 하면 독일이 생각날 만큼 자동차 발전에 엄청난 역할을 한 두 남자가 있습니다. 고틀리브 다이믈러(Gottieb Daimler)와 칼 벤츠(Carl Benz)입니다. 

 


다이믈러는 슈튜트 가르트의 빵 제조업을 하시는 아버지를 두었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기계에 심취하여 14살 때 소총 제조회사에 수습공으로 취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전문 교육을 받고 싶었던 그는 슈튜트 가르트의 산업 기술 고등 훈련소에 입학했고, 1866년 추천을 받아 슈 베르게 증기기관차 제조회사로 입사하여 증기기관을 연구하게 됩니다. 

 


내연기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기술 선진국에 해당하는 영국, 프랑스, 벨기에를 돌아다니며 기술을 습득하고 본국으로 돌아와 로이드 랑켄회사의 기계 기사로 취직해 근무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며 일하던 중 빌헬름 마이바흐(Wihelm Maybach)를 만나게 됩니다. 

 


그 두 사람은 1872년 당시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는 니콜라스 오토가 창업한 도이츠(Deutz) 가스모터 제작 회사로 스카우트됩니다. 이 회사에서 4사이클 엔진개발에 참여했고 또 기술을 쌓아 1881년에는 마이바흐와 함께 칸 슈타트에 기계제작소를 설립했습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작동하는 동력을 개발합니다. 연구 중에 몇 번씩 실험실이 폭발하기 하는 등 고생 끝에 1883년 가솔린 엔진을 완성했고, 같은 해 12월 16일 독일 제국 특허 No 28022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엔진은 열튜브 점화 방식이라서 고속으로 회전할 때 점화시기 조절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기화기와 플라이휠을 추가해서 가솔린 엔진 실용화에 큰 공헌을 했고 1885년 11월 10일 목재 새시로 된 0.5마력의 2륜 차를 만들었는데 이 것이 최초의 오토바이가 입니다. 다음 해 다이믈러는 1분 당 700회 넘게 회전하는 4사이클 2마력짜리 가솔린 엔진과 벤츠의 3륜 차보다 더욱 개선된 4륜 차를 만들었고 더불어 단기통 모터보트 소방펌프 그러고 세계 최초로 V형 실린더 구조도 고안해내는 등 모든 분야에서 성과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1890년 슈튜트 가르트에 다이믈러 자동차 회사를 창업하면서 동시에 2중 구조의 실린더 블록도 발표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얼마 뒤 프랑스, 영국 등 유럽 각지에서 이 엔진의 사용 특허를 신청하기 위해 몰려들게 됩니다. 
그 결과 연간 45대의 차를 판매해 3000마르크를 벌었습니다.

 

 

벌집형 라디에이터의 개발, 설치차의 등장



당시 엔진은 오늘날과 같이 냉각 라디에이터가 따로 없어서 냉각수 탱크의 물을 펌프로 순환시켜서 엔진을 냉각시켰었는데 항상 40L 이상의 큼지막한 물탱크에는 냉각수가 가득 채워져 있어야 했습니다. 

 


이건 1897년 다이믈러 회사에 의해서 최초로 벌집형 라디에이터라는 게 개발되어 전 세계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고 거의 모든 제조사들이 이 방법을 따라서  부피 및 무게를 줄이게 되면서 이때부터 냉각수는 9L만으로도 충분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초창기에는 냉각 순환 쪽이 원활치 못해서 조금만 과열이 되면 라디에이터가 끊기는 현상도 빈번했습니다. 


이때 첫 라디에이터 설치차가 등장했습니다.

피닉스호가 그것입니다. 이 차는 후부에 펜을 달아 라디에이터 외 프런트 엔진 장착에 U자형 철제 프레임을 사용했고 공기타이어도 부착했습니다. 2기 통 6마력 최고 시속 42Km. 다이믈러 회사는 이 차를 시장에 내놓으므로써 극찬을 받았고 판매도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다이믈러가 사는 슈튜트 가르트에서 약 150Km 떨어진 만하임에 살았던 가난한 기술자 벤츠도 기계에 미쳐 있었습니다. 칼은 카슬 철도회사 소속 증기기관차 기관사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릴 때 그의 기술적 재능을 발견한 엄마는 그를 카슬  공예학교에 보냈고 당시 주목받고 있던 가스엔진을 배우게 됩니다. 

 


졸업을 한 이후 증기기관과 카슬 기계제작 회사를 거쳐서 기술을 익히고 1872년 만하임에 작은 기계 사무실을 차리게 됩니다. 하지만 프러시아 전쟁이 끝나고 난 후라 유럽 전체는 어수선했고 경제도 불황의 연속이라 경영은 어려웠습니다. 벤츠도 사업이 부진하자 심지어 동업자도 그를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벤츠의 결혼과 사업 성장

 


그래서 그는 같은 해에 재력있는 건축업자의 딸 베르타 링케(Bertha Ringer)와 결혼했고, 그녀의 가족으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으며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수많은 실험을 거치면서 1880년 단기통 2사이클 엔진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엔진은 작동에 문제가 있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처음에는 잘 알려진 4사이클 엔진을 만들려고 했지만 당시 오토의 4사이클 엔진 특허권에 저촉되어서 제작 자체가 불가능해지자 다시 2사이클 엔진 제작을 시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1884년 오토엔진의 특허 소송이 무효로 판정이 났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구상해오던 4사이클 엔진 제작에 돌입했고 끝내 완성을 시키게 됩니다. 점화 방식 또한 다이믈러의 열 튜브보다도 향상된 배터리를 이용한 점화 방식을 설치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필요했었고 조향이 편리한 3륜 차를 만들어서 그 위에 엔진을 실은 다음 주행시험을 실시했습니다. 결과는 성공이었습니다. 1886년 1월 29일 그는 바로 특허 신청을 했습니다. 그 제목은 이렇습니다. <가솔린 동력 발생에 의해 움직이는 탈 것>. 특허번호 37435.

 


그렇지만 꼼꼼한 성격의 벤츠는 너무 소심했던 나머지 감히 밖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만하임의 지방 신문(1886년 6월 4일)에 특허를 낸 벤츠 자동차에 대한 기사가 실립니다. “벤츠차는 엉성하고 볼품이 없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에 화가 잔뜩 난 사람은 벤츠 보다도 그의 아내 베르타였습니다.



그럴만도 한 것이 전 재산을 탕진하며 연구한 끝에 완성한 특허 차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활달한 성격의 벤츠 부인은 1886년 7월 3일 아들 둘을 데리고 만하임에서 친척이 사는 포르츠 하임까지 약 144Km의 거리를 직접 시운전했습니다. 시운전을 한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서 하겠습니다.